[오마이뉴스] 삼성이 애플을 못따라 잡는 이유 뉴스기사와 함께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이 궁지에 빠진 데는 언론의 탓이 크다. 전문적 식견도, 비판적 안목도 없는 한국 언론이 정부와 기업의 발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홍보해 온 탓이다. 사진에서 보듯, 한국 언론은 와이브로가 '한국 10년 먹여살릴 금맥'(중앙일보), '2012년까지 수출효과 30조원' (동아일보), '경제효과 94조원 이상'(데일리경제)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와이브로는 막대한 세금과 투자비용을 쏟아붓고도 제대로 쓰이지 못한 채 사장되는 신세를 맞았다.
ⓒ 강인규
정보통신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기억하는가? 2년 전 이때를.

 

다시 말해 한국에 아이폰이 등장하기 전 말이다. 기억을 돕기 위해 덧붙이자면, 한국 언론이 '아이폰, 한국에서도 통할까?,' '아이폰, 너 떨고 있니?,' '토종 웃고, 외산 울고' 같은 헤드라인을 쏟아내던 때 말이다.

 

한국에서 아이폰이 판매되기 시작한 게 2009년 11월이니,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기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가. 불과 일 년 반 사이에 뒤바뀐 한국 언론의 보도가 이 변화상을 잘 말해 준다.

 

"한국 IT, 구글의 하청업체 전락 위험"

"삼성전자, 구글 하청업체 된다"

"소프트웨어의 역습… IT 한국에도 올 것이 왔다"

"삼성·LG '소프트웨어 힘 키워라'"

 

한국 언론은 그동안 뭐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애플·구글 게 섰거라'고 외쳤으나, 잘 서주지 않았던 걸까? '소프트웨어의 역습'? 정보통신산업이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2년 전 '뉴미디어 기획'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이 경쟁력을 갖고 있던 하드웨어 분야는 급속도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예컨대 휴대폰 산업은 애플이나 구글처럼 소프트웨어 기반업체들의 지배권 밑으로 편입되고 있다. 이제 제대로 된 인터넷 기반 플랫폼을 갖추지 못한 하드웨어 기업은 소프트웨어 업체의 하청공장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세계 최강의 휴대폰 업체인 노키아 주식이 올 들어 16퍼센트 하락한 것은 이런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삼성과 엘지 등의 하드웨어 업체들이 긴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09. 9. 1. "트위터 '2등'으로 밀어낸 한국... 뿌듯해?"

 

한국 정부도 부랴부랴 나섰다. 삼성, 엘지 등의 대기업과 함께 직접 모바일 운영체제(OS)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복잡하게 분석할 것도, 장황히 설명할 것도 없다. 조상의 재담을 잠시 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남이 장에 간다니 거름 지고 나선다.'

 

IT 대신 '강바닥 파기'로 고용 창출한다던 정부

 

이 법석의 주역이 '지식경제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정통부의 폐지였다. 이 결정은 물론 "정보통신산업(IT)은 고용 창출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 대통령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강바닥 파기'가 21세기 고용 창출 원동력이라 믿는 정부가 만드는 운영체제('명OS'?)에 기대를 품는 게 현명한가?

 

적어도 두 가지는 기대할 수 있다. 국민과 전문가의 의견과 상관없이 정부 멋대로 시작할 것이고, 4대강 개발처럼 '임기 내에 마무리한다'며 속전속결로 끝낼 것이다. 밀실행정과 단기 성과 집착이 한국 정보통신산업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정부가 한다고 하면 언론은 '떨고 있니' 시리즈로 응답할 것이고, 대기업경제연구소는 수만의 '고용 창출'과 수십 조의 '경제 효과'를 전망하는 것으로 화답할 것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유성호
이건희

삼성 같은 대기업은 기대할 만하지 않느냐고? 이건희 회장은 지난 8월 말 '소프트웨어 경쟁력'를 역설했다. 하지만 그 발표가 있기 불과 석 달 전, 삼성전자는 '국내 중소업체에 위탁해온 모바일기기용 소프트웨어 용역 개발을 중국·인도 등의 해외업체로 전환한다'고 발표했었다. 원가 절감을 위해 노임이 싼 해외에 소프트웨어 개발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정보통신산업의 핵심축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이동한 상황에서 소프트웨어에서 인건비를 건져 '싼 가격'으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삼성의 수익률이 계속 낮아지는 이유는 소프트웨어 기술의 부재 때문이다(애플의 수익률이 높은 이유는 삼성과 정반대다). 하드웨어의 기술 격차는 급속히 줄어들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하드웨어의 경쟁력은 가격 인하 싸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은 부가가치 높은 경쟁력의 핵심인 소프트웨어를 해외로 넘기기로 한 것이다. 핵심 소프트웨어 기술을 해외로 아웃소싱하지 않는 것은 세계 정보통신업계의 상식이다. 물론 '핵심 소프트웨어 기술'이랄 것도 없는 삼성의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는 삼성의 가장 강력한 경쟁기업이 등장하고 있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인건비가 빨리 상승하는 곳이다. 인도의 올해 평균 임금 상승률은 12.9%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해 중국의 임금 수준은 인도의 두 배가 넘는다. 아웃소싱은 고용의 질 면에서도 적잖은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5년 전 이미 아웃소싱 포기한 애플

 

애플도 한때는 대규모의 해외 아웃소싱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잘나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2006년, 애플은 매킨토시의 기술 지원 및 개발 일부를 인도로 넘긴다는 구상을 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경영자로 복귀한 직후로,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회사를 구하기 위한 위기 타개책의 성격이 짙었다.

 

당시 애플의 주요 동기는 '인건비'였다. 이를 위해 2007년까지 인도 현지에서 3000명을 신규 고용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잡스는 이 모든 계획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버렸다. 인도의 임금 상승률이 높아 인건비 절감을 꾀하기 어렵고(2000년부터 2004년 사이 평균 임금 상승률은 13%였지만, 중간경영자의 임금 상승률은 30%에 이르렀다), 인력 빼가기 경쟁이 치열해 안정적인 고용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용 창출을 바라던 인도는 물론 크게 실망했다. <인디아 타임스>는 "애플 소프트웨어, 인도에서 로그아웃하다"라는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비즈니스위크>는 애플이 인도에 '로그인'을 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애초에 그럴 계획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인도에 넘기려던 것은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애플은 애초부터 고급 소프트웨어 개발을 인도에 맡길 생각이 없었다. 다른 회사들과 달리, 애플은 연구 개발과 제품 개발을 거의 전적으로 캘리포니아의 본사에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위크> 2006년 6월 19일 "인도: 왜 애플은 시작도 않고 포기했나")

 

결국 애플은 '주변적 아웃소싱' 계획마저 폐기한 것이다. 하드웨어는 해외에서 생산할망정 소프트웨어만큼은 자신들의 손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제품 차별화와 경쟁력의 핵심이 된 시대에 이를 외부에 맡기는 것은 뇌와 심장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폰은 세계 정보통신기술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물론, 사람들이 소통하고 정보를 얻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사진은 2010년에 아이폰4를 소개하는 애플의 전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
ⓒ 공개자료
아이폰

소프트웨어로 인건비 아끼겠다는 삼성

 

애플과 반대의 길을 택한 삼성의 결정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을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파악하는 태도는 한국 개발자를 쥐어짜던 못된 버릇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개발자 착취에는 기업과 정부가 따로 없다. 일 년을 매달려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급 업체끼리 경쟁을 붙여 석 달 만에 끝내게 만드는 행태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이익은 자기들이 챙기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하도급 업체에 떠넘긴다.

 

계약서도 쓰지 않고 일을 맡기는 건 예사이고, 필요할 때마다 개발인력을 빼가 중소업체의 생존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렇게 뽑아간 인력을 잘 쓰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대기업의 위계적 조직 구조는 개발자의 주체적 판단이나 창의성을 용인하지도 않는다. 그저 '윗사람'이 원하는 안전한 결과물을 (다시 말하면 이미 있는 것을 베껴) 최대한 빨리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소프트웨어가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사실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한국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정말 훌륭하게 잘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자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말하는 것은 공염불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한국형 잡스 양성 계획'을 논하고, 기업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소프트웨어를 아웃소싱하겠다고 발표한다. 

 

정보통신보다 강바닥 파기가 더 고부가가치를 지닌 미래산업이라는 정부.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면서 저임금 국가(한국도 만만찮은 '저임금 국가'다)로 소프트웨어 개발을 넘긴다는 기업, 이들이 힘을 합쳐 애플과 구글에 맞설 새 운영체제를 개발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협력 관계에 적절한 명칭을 붙이자면 '덤앤더머 컨소시엄'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2년 전에도 말했지만,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국 정부와 기업 모두 하루아침에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 것이다.

 

  
'한국의 소프트웨어 기술자 노임단가표.' 한국에서 개발자들은 능력보다는 학력과 경력의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평가되는 기준에 의해 대우 받는다. 개발자들의 실제 보수는 이 기준표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하도급업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입찰에 참여하게 된다. 개발자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소프트웨어 산업 육성'은 헛구호가 될 수밖에 없다.
ⓒ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소프트웨어

코앞의 돈만 보는 기업과 정부

 

창의적 인재를 기르라고 했더니 '한국형 잡스 양성계획'이라는 줄 세우기 식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소프트웨어가 중요다다고 하니 '바다(Bada)' 같은 운영체제를 급조해 낸다('혼란스럽고 전혀 직관적이지도 않다'는 품질에 대한 혹평은 그렇다 치고, 이름부터 제대로 붙이면 좋겠다. '배드애스 Badass'라는 별명을 의도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한국에서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투자도, 후원도 받을 수 없다. 정부부터 '5년짜리 근시안'을 벗어던져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모든 게 바뀌거나 정지되어야 한다면, 아예 정보통신사업에 간섭하지 않는 게 낫다. 

 

이런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운영체제는 물론 아마존,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세계적 인터넷 서비스가 탄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터넷 소매점인 아마존은 1995년에 출범했다. 당시 창립자 제프 베조스는 '기이한' 경영전략을 세운다. 사업 시작 후 5년까지는 흑자를 낼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볼멘소리를 내는 투자자도 있었으나, 베조스는 큰 어려움 없이 사업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마존의 '느린 수익 전략'은 주효했다. 2000년 초반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온라인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할 때, 아마존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6년 후인 2001년에 첫 흑자를 기록한다.

 

빠른 수익을 기대하지 않는 '답답한 전략'으로 말하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만만치 않다. 2004년에 시작된 페이스북은 2009년 후반까지도 이익을 내지 못했다.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2010년 말에도 페이스북이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는 수준'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광고나 유료 서비스로 벌어들인 수익 대부분을 사용자 확보와 서비스 개선에 재투자하기 때문이다.

 

2006년에 선보인 트위터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익모델을 찾는 중이다. 한두 해만 수익이 안 나도 사업을 접거나 투자를 포기하는 한국 기업이나 투자자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게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한국에서 이런 서비스가 탄생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인터넷 산업은 '느린 수익모델'로 유명하다. 제프 베조스는 1995년에 아마존을 창립하면서 투자자들에게 향후 4~5년간 수익을 낼 의사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왼쪽은 <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꼽힌 창립자 베조스. 아마존이 첫 흑자를 기록하기도 전이다. 오른쪽은 2009년 <포춘>지 표지.
ⓒ Time/Fortune
아마존

가장 중요한 건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

 

한동안 '이런 것 왜 못 만드냐'가 유행하더니, 이제 '창의적 인재'가 유행이다. 정부도, 기업도 '창의적 인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이 '창의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시카고대 교수 로버트 버트가 쓴 <좋은 아이디어의 사회적 기원>은 창의적 인재의 특징을 '교차로(intersection)형'으로 정의한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문화, 다양한 지식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창의적인 발상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 다양한 사고를 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한국의 경쟁 교육과 경쟁 체제가 멍청한 이유는, 다양한 사고를 저해함으로써 오히려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카이스트에서 '공부 열심히 시킨다'며 일정 학점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징벌적 등록금'을 물리기 시작했을 때,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안전한 선택'이었다. 학점을 올리기 위해 이미 잘 알고 있거나 잘할 수 있는 과목만 수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교육 환경에서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탐구해 '교차로형 지식인'이 되길 기대하는 건 어리석다.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그렇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드문 '위험 회피 사회'다. 살벌한 경쟁 체제가 안전하고 보수적인 선택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며 지속적으로 고용 유연화 정책을 펴 왔다. 그 결과 초등학생 꿈이 '9급 공무원'인 기이한 사회가 되었다. 물론 경쟁 체제가 몰고 온 더 비극적인 결과는 세계 최고의 자살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지만 말이다.

 

버트 교수는 '실패의 용인'이 창의적 인재 양성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항상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수로 낙오자가 되는 살벌한 경쟁 체제에서는 누구도 쉽게 '위험한'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 것이다.

 

결국 경쟁에서 자유롭게 지식과 경험을 쌓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어도 쉽게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창의적 인재가 탄생할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목표는 여기에 두어야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경쟁력'을 외쳐대는 경쟁력 없는 정부 밑에서 한국 사회는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고질적 학벌주의와 이로 인한 경쟁 교육은 '국내용 아귀다툼'일 뿐이다. 국민들의 삶의 목표가 생존이 되고, 태어날 자식들이 고통스러울까봐 출산을 주저하고, 이미 태어난 자식이 죽음을 택하는 게 어떻게 '경쟁력'이란 말인가.

 

  
블로거 로버트 스코블과 포즈를 취한 페이스북의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오른쪽). 그는 최근까지도 페이스북이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나드는 수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뉴미디어기획17]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몰락, 그 원인과 대책
11.09.16 19:07 ㅣ최종 업데이트 11.09.16 19:07

[한경] 하의실종 패션, 남성 시선과 여성 시선의 차이 뉴스기사와 함께

입력: 2011-07-09 17:26
‘야한 여자가 좋다.’

이 말은 남성의 시각에서 표현한 것이다.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성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들을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야하다’는 관점에 대해서다. 여성들은 요즘 흔히 말하는 ‘하의실종’ 패션이나 초미니스커트 등을 입을 때 이를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개성적인 자기표현이라고 말한다. 멋지니까 그냥 입는다고 한다. 둔부를 겨우 가릴 정도의 미니스커트(이른바 나노 미니스커트)나 하의실종 패션을 멋있어 보이기 위해 입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의 시선이다.

남성들이 흔히 말하는 ‘야한 여자’는 시각적인 것을 전제한다. 보지 않으면 야하다는 느낌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시각적인 것의 본질은 포르노그래피적이라고 한다.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성질을 지닌다. 시각적인 것은 결국 넋을 잃고 정신없이 매료되게 만든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쓴 ‘보이는 것의 날인’이라는 책에는 이런 문장이 글의 맨 처음에 등장한다. 우리 사회가 시각 문화의 홍수에 살고 있는데, 이 말은 바로 그 시각 문화와 세계의 존재론을 함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시각적인 것이 우선시되면서 다른 감각들이 고갈되는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시선의 우생학’에서 알 수 있듯이 찰나의 순간을 잡기 위한 무한 경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시선은 욕망의 메타포이며 욕망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유포하는 ‘욕망의 판타지’

지나친 편견일지 모르지만, 요즘의 ‘하의실종’ 패션에서는 넋을 잃을 정도로 매료하게 만드는 게 없는 것 같다. 섹슈얼리티나 절제미, 미적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함을 줄 뿐이다. 심지어 ‘시각적 폭력’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때로는 이를 쳐다보기조차 민망하다. 한번은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학생과 상담을 하는데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상담 내내 난감했던 적이 있다. 이는 상담자를 배려하지 않는 패션이다. 여성들은 패션이 개성적인 자기표현이자 만족이라고 하지만 상담을 할 때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매너도 필요하다. 포털사이트에서 ‘하의실종 종결자 등극’에 낚여 클릭해보면 혐오감마저 든다.

‘종결자’의 주인공은 이른바 ‘시선의 우생학’을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끌어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몸값을 높이려는 연예인이기에 그럴 수 있을 테지만 학생들까지 이를 모방할 필요가 있을까.

패션에서는 몸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몸을 보호하는 사용 가치와 함께 최근에는 ‘몸의 권력화’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섹슈얼리티라는 이른바 ‘기호 가캄가 중시되고 있다.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은 이 기호 가치를 더 높여 몸의 권력화를 강화하기 위해서일 게다.

하의실종 패션이나 ‘나노 스커트’ 패션은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소비’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차이는 결국 여성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종국에는 전체주의화되면서 차이를 없게 한다. 그럴수록 더 차이 나는 패션을 하기 위해 더 짧아지는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다.

임철규(전 연세대 교수)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 따르면 남성의 시선은 권력을 상징한다. 남성의 시선은 폭력적이고 심지어 제국주의적이라고까지 한다. 남성의 눈은 욕망을 추구하는 힘 그 자체라고 한다. 로마의 시인 바로(Marcus Terentius Varro)는 “눈의 지각이 뿜어내는 힘은 별들에도 이른다”고 했다. 바로는 사냥꾼 악타이온이 목욕하는 아르테미스를 ‘눈으로 범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나는 본다’에는 ‘눈으로 범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 음욕을 충족한다’라는 말도 있다.

눈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그 대상을 소유해야 한다. 제국주의 역사도 여기서 비롯된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멸한 것도 금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눈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는 눈과 눈의 죄악, 단죄가 자주 나온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악마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대부분 눈 때문에 악마적 행위가 일어난다.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면서 시작됐다. 파리스가 미모의 헬레네를 보지 않았다면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도 바로 눈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요즘 유행하는 미니스커트나 하의실종 패션은 자본과 그 자본의 논리에 의해 경영되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걸그룹, S라인, 킬힐 등은 모두 우리 시대의 미디어가 유포하고 소비하는 ‘욕망의 판타지’ 혹은 ‘판타지의 욕망’들이다.

하의실종 패션이나 초미니스커트의 유행 역시 자율적인 주체들을 통해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생겨났다고 착각하게 할 뿐이다.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타자’라고 한다. 대중에게 모방해야 할 욕망의 대상이 되는 ‘타자’ 혹은 ‘자아 이상(ego ideal)’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스타급 연예인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대중스타, 광고 안의 탤런트나 배우, 그리고 광고 속의 상품이 자아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타자 혹은 자아 이상은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모방과 함께 차이 나는 소비를 부추기는데 대중은 이를 알면서도 복종하고 동참한다. 수많은 여성이 하이힐은 신체적인 ‘고문’이라고 부작용을 지적해도 하이힐 신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들은 S라인과 킬힐, 하의실종 패션과 같은 과도한 이미지의 섹슈얼리티에 사로잡히고 있다. 모델을 통해 이러한 패션에 대한 모방 욕구를 자극받을수록 그것의 ‘향유’보다 ‘억압과 배제’를 경험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섹슈얼리티로부터 소외’인 셈이다.

외신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포르노 소비국 1위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남성들의 정력이 왕성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시각 문화와 그 자본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포르노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마도 시각적 자극에 예민한 남성의 본능적 속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여성들은 시각보다 청각에 예민하기 때문에 시각적 자극을 강조하는 포르노에 흥미가 없다. 남자와 여자는 이러한 성 본능의 차이 때문에 서로 오해를 낳기도 한다.

시각 문화의 홍수 속에서 여성들이 섹슈얼리티로부터 소외를 경험한다면 남성들은 포르노그래피로부터 소외를 경험한다. 일반인은 대부분 포르노의 모델처럼 재현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남성들은 모두 ‘준(準) 발기’ 상태에서 욕망의 포로에 강박당한 채 지쳐가고 있다고도 한다. 이 모두가 자본을 욕망하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시각 문화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결핍’과 ‘부족감’을 느끼게 해야 모방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핍을 부추기는 것은 결국 자본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피투체, 즉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미디어가 ‘호명’하는 상품이 소비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미디어에 의해 내던져진 존재’가 된다. 미디어라는 렌즈가 만든 객체(상품과 욕망)를 모방하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대학 캠퍼스를 걷다 보면 고가의 명품 핸드백이나 명품 로고가 찍힌 쇼핑백에 책을 넣고 다니는 여학생도 있다. 이게 자본에 굴복하는 전형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풍경’ 하나를 꼽으라면 여대생들의 이해할 수 없는 패션이다. 도서관에서조차 ‘나노 미니’를 입는 여학생들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여대생이란 등교할 때는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명품 핸드백 대신 책이 든 가방을 멘 모습이 아닐까. 남학생들은 그런 여학생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CAMPUS Job & Joy 2011년 7월호 제공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 치마 입은 이 남자, 잘생겼죠? 패션

치마 입은 이 남자, 잘생겼죠?
[주장] 치마 못 입는 남자, 양복 못 입는 여자?... 옷차림 안의 젠더 이분법 뛰어넘기

2010.12.13
12월 중순, 대학생들의 한 학기가 끝나가고 있다. 이번 학기 내가 들었던 수업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성과 문화>라는 전공 과목이었다. '젠더'라는 고리타분하지만 질적 변화를 거듭해 온 오만가지 이론들을 배우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알아듣기 힘든 이론적인 얘기는 제쳐두고서라도, 우리 일상 생활 면면을 통해서도 젠더, 즉 여성과 남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수업에서 주어진 과제 중 하나가 조별로 이 '젠더'와 연관된 이슈 중 하나를 선택해 사회적인 '액션'을 취해보는 것이었다. 우리조는 '크로스드레싱'을 통해 가장 미시적인 일상 생활인 '옷차림'과 여성성-남성성이 어떻게 얽히고 설켜있는지 알아보았다. 여기서 크로스드레싱이란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거나 반대로 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는 것을 뜻한다.

 

남자는 왜 치마를 입으면 안 되는가?

 

이것이 처음 우리를 이끈 소박한 질문이었다. 다음은 이 질문에서 시작해 우리가 직접 '크로스드레싱'을 해보며 만든 '도전! 공익광고 모델' 프로젝트의 공익광고 이미지들이다. 편한 마음으로 감상해 보시길.

 

  
▲ ANY PROBLEM? 다음 중 잘못된 점을 지적한 것으로 옳은 답을 고르시오. 1) 남자는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안 된다 2) 여자는 다리를 쩍 벌리고 앉으면 안 된다 3) 공공장소에서 다리를 벌리는 것은 민폐다 모델 신한슬, 유홍재. 촬영 김현민.
ⓒ 신한슬
크로스드레싱

 

  
▲ ANY PROBLEM? 모델 신한슬, 유홍재. 촬영 김현민.
ⓒ 신한슬
크로스드레싱

 

  
▲ ANY PROBLEM? 모델 신한슬, 유홍재. 촬영 김현민.
ⓒ 신한슬
크로스드레싱

 

패션은 하나의 이미지이고 코드이다. '보이 프렌드 핏' 청바지가 실제로 남자친구의 청바지는 아니고, '밀리터리 스타일'의 야상점퍼를 입는 것과 군용 잠바를 입는 것이 엄연히 다르듯이.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크로스 섹슈얼' 의상 코드다. 크로스 섹슈얼은 여성들의 의상이나 머리 스타일, 액세서리 등을 하나의 '패션 코드'로 생각해 치장을 즐기는 남성을 뜻하는 말이다. 스키니 팬츠나 액세서리를 하는 등 여성의 화려함을 차용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남성으로서 자신을 가꾸는 메트로 섹슈얼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정의된 바에 의하면, 이들은 패션 외의 행동, 말투 등은 남성다워서 '여자 같은 남자'와도 구별된다. 이들은 여성의 '화려함'을 입는 것이지 실제로 여성의 옷을 입는 것은 아니며, 여성스러움을 성격에 까지 가져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코드'이자 하나의 패션 '트렌드'인 수준에서 소화되고 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어째서 사회의 인식이 코드가 소화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일까? 여자가 매니쉬(mannish)한 옷은 입어도 남성복(male clothing)을 입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반대로 남자가 페미닌(Feminine)한 감성의 크로스 섹슈얼 스타일은 즐겨도, 여성복(female clothing)을 입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굳이 여성복과 남성복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사회가 '용인하는' 패션 코드를 넘어서는 옷차림에 대해선 날선 비난이 쏟아지기 일쑤다.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 커뮤니티 익명게시판에 위의 사진들을 게재했을 때 "거세해야 한다"는 입에 담지 못할 비난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여자는 왜 수트를 입지 못하는가... 옷 차림에 제약된 나의 몸

 

더운 여름날 나는 핫팬츠를 입고 두 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낼 수 있다. 미니스커트건 롱스커트건 시원한 옷을 입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여름에 입기에 롱스커트만큼 완벽한 옷이 있을까. 시원하면서 편하고 치마가 팔랑팔랑 거리는 것이 재밌기까지 한데. 그런 내 옆에서 남자친구는 긴 바지를 입고 덥다고 난리다.

 

다만 바지를 입는 남자로서 남자친구가 누리는 것도 있다. 바로 행동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다. '바지를 입는' 그는 다리를 벌리고 서거나 앉아도 된다. 치마를 입는 몸을 가진 나는 앉으나 서나 다리를 모으고 무릎을 붙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내가 바지를 입고 다리 벌린 채 서거나 앉는 것은 남자친구가 그렇게 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상황에서 다리를 벌리는 것이 오히려 내겐 불편함을 줄 정도로 내 몸은 치마에 갇혀 있다.

 

치마와 바지, 여성복·남성복 등의 구분 속에 내 몸이 갇혀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장바구니에 담는 나의 '클릭질'에 과연 나의 의사가 얼마나 반영되어 있을까?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복'이라는 테두리 안의 옷밖에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복'이란 옷과 함께 나의 행동 역시 테두리 안에 갇히고 만다. 나는 왜 수트를 입을 수 없는 것이고? 또 남자는 왜 스커트를 입을 수 없는 것일까?

 

'차이'는 '차별'과 다르다고 우리는 자주 말한다. 그런데 정말로 '타인의 취향'은 일상 생활 속에서 충분히 존중되고 있을까? 그렇다면 왜 '크로스드레서'들은 특별히 멋진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복장도착자'로 규정되고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끝으로 자신들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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